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파월 한군군의 철군은 2단계로 나누어 실시되었다. 그중 제1단계철수(1971년 말)는 주월 한국군의 일부가 철수한 것으로 북베트남군의 구정공세(1968년 1월)에 충격을 받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베트남인에게 맡기고, 미군을 축차적으로 철수 시킨다"는 정책에 따라 실천에 옮겨진 자유우방군의 철수 계획에 따라 시행되었다.

한국군 철군

철거 단계 및 철군 병력 비례
철거 단계 및 철군 병력 비례

파월 한국군의 철군은 2단계로 나누어 실시되었 다. 그 중 제1단계 철수(1971년 말)는 주월 한국 군의 일부가 철수한 것으로 북베트남군의 구정공 세(1968년 1월)에 충격을 받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베트남인에게 맡기고, 미군을 축차적으 로 철수시킨다”는 정책에 따라 실천에 옮겨진 자 유 우방군의 철수 계획에 따라 시행되었다. 이어서 제2단계 철수는 1973년 초에 제네바에서 체결된 휴전협정에 규정된 “모든 외국군은 휴전 후 60일 이내에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한다”라는 조항에 따라 실시된 주월 한국군 주력의 철수였다.

주월 한국군의 제1단계 철군이 개시된 1971년 말, 당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자유우방군 가운데 주월 한국군만이 파월 당시의 병력 수준인 47,860명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고, 전투부대를 파병했던 국가 중에서 미국을 제외한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필리핀·타일랜드 등은 이미 주력의 철군을 끝내고 각각 100명 이내의 상징적인 병력만을 잔류시키고 있는 상태였다.

이에 따라 주월 한국군도 국방부 훈령 제71-1호(주월 한국군 철수:1971. 8. 30) 및 동 훈령 수정 1호 (1972. 2. 21)에 따라 제2해병여단과 주월 한국군사령부 직할대 일부, 제100군수사령부 예하부대 일부 및 해군 수송전대 일부 병력 등 총 파월 병력의 1/5(10,000여 명)에 해당하는 병력을 7개 제대로 편성하여 1971년 12월 4일부터 1972년 4월 6일까지 철수시켰다. 그리고 2개 보병사단을 주축으로 한 주월 한국군의 주력(37,000여 명)은 1973년 초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 주둔하였다.

이어서 1973년 1월 28일 휴전이 성립되자, 주월 한국군은 잔류부대의 철수를 지시한 국방부 훈령(1973. 1. 26)에 의거 주월 한국군 사령부 및 직할대, 수도사단, 제9사단, 제100군수지원사령부, 건설지원단, 해군수송전대, 공군지원단의 선발대와 본대(11개 제대), 그리고 후발대로 편성, 1973년 2월 3일에 철군을 개시하여 1973년 3월 23일에 철수를 완료하였다.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개선장병 환영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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