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미국은 베트남 상화의 악화에 따라 점진적으로 전투 병력을 증강하였다, 즉 베트남 전쟁의 미국화 추진으로 베트남전쟁에 개입하였다.

미국의 개입과 ‘베트남전쟁의 미국화’

남베트남에 대한 미국과 하노이 정부의 지원이 경쟁적으로 확대되면서 남베트남 상황은 전쟁과 유사한 수준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1963년 12월이 되면서 하노이 정부는 정규군의 남파와 미군에 대한 직접 공격을 결의했다. 하노이 정부의 내부적인 선전포고인 셈이었다.

‘베트남전쟁의 미국화’ 와 미군의 개입

그때쯤 미국 정부도 ‘베트남전쟁의 미국화’로 베트남 사태를 미국이 직접 떠안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1964년 5월 9일에는 한국을 비롯한 자유우방 25개국에 존슨 대통령의 서한을 보내 남베트남 지원을 요청했다. 이어서 같은 해 8월 4일에는 미국정부가 “통킹만 공해상에 정박한 미군 함정이 북베트남 어뢰정의 공격을 받았다.”며, 소위 ‘통킹만사건’을 발표하면서 북베트남 항구시설을 폭격했다.

이로써 전쟁은 미국과 북베트남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그에 앞서 지엠 정부의 족벌 독재정치와 관리들의 부패, 그리고 주민들의 의사를 무시하는 각종 정책에 대한 반대시위로 사회혼란과 민심이반 현상이 극에 달했다. 그 결과 지엠 일족(一族)은 1963년 11월 1일 발생한 쿠데타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던 지엠 정권이 무너진 남베트남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쿠데타와 정권교체로 국민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정권의 핵심부는 나라의 안보는 미국에 맡긴 채 정권탈취와 권력기반 강화에 혈안이 되었다.

한편 미국은 ‘통킹만사건’에도 불구하고, 지상군 파병을 즉각 결정하지 않았다. 공군에 의한 폭격으로 북베트남의 항복, 또는 양보를 얻어낼 수 있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트남 사태는 미국의 희망과 정반대로 발전되기 시작했다.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곳곳에서 미군 기지를 습격하면서 미군의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고심했던 미국 정부도 지상군 파병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결국 1965년 3월 8일, 2개의 해병대대가 다낭에 상륙한 것을 계기로 미국의 지상군이 본격적으로 파병되기 시작했다.

미군의 병력 증강과 변화

미군의 병력 증강은 1968년까지 점진적으로 증강했다. 이는 전쟁 원칙 측면에서 보면 병력의 분산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개입 초기 적에 대한 정보 판단과 경미한 대처가 원인이었다. 1967년 웨스터멀랜드 장군은 추가 파병 요청을 건의했으나 오히려 미국의 여론은 병력의 철수를 강하게 요구했다. 1969년 7월, 닉슨 독트린에 의해 미군은 철수를 개시했다.

미군의 병력 증강과 변화 정보
연도 1964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병력 17,200 161,100 388,568 497,498 548,383 475,678 344,674 156,975 29,655

※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과 전개과정에 대해 더 알고 싶으면?

붕따우에 상륙하는 미 제1보병사단(1965.6.13)
붕따우에 상륙하는 미 제1보병사단(1965.6.13)

주월 미군사령부(MAC-V)가 위치했던 사이공 떤선넛공항일대
주월 미군사령부(MAC-V)가 위치했던 사이공 떤선넛공항일대
: 중앙의 직사각형 건물이 미군사령부

  • ⓛ 최용호, 『한권으로 읽는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4, pp. 59∼70
  • ② George C. Herrring, America's Longest War, fourth ed. 2002, pp. 3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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