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베트남은 아시아 대륙의 동남쪽 해안을 따라 길게 뻗쳐 있다, 역사적으로 비엣족 중심의 민족은 주변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현대사에서 프랑스와 미국, 그리고 남ㆍ북 베트남 간 3차례 전쟁을 겪으면서 통일을 이룬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베트남 전쟁용어 표기

베트남(월남)전쟁 명칭 관련
가. 현실태

우리나라에서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과 관련해 ‘월남전쟁’과 ‘베트남전쟁’이라는 두 가지의 용어가 혼용되고 있다. 또한 과거 1960년∼1980년대까지의 모든 공공문서, 모든 법률용어 등이 ‘월남파병’, ‘월남전쟁’ 등으로 표기되어있었으나 최근에는 대부분 ‘베트남’, ‘베트남전쟁’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따라서 국내에서는 대부분의 문서, 책자, 언론 등에서 ‘월남전쟁’보다는 ‘베트남전쟁’이라는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또한 그 같은 추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나. 표준어

언어 사용과 관련해 국가는 표준어 및 공용어를 제정하고 보급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것은 가장 많은 국민들이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언어를 표준화하고 또는 공용어로 채택하는 절차다. 따라서 언어 사용과 관련해 첫 번째로 고려해야할 요소는 국민들의 언어(용어) 사용 빈도다. 두 번째로 외래어의 경우 가급적 현지의 발음과 가깝도록 표기한다는 것이다. 그 같은 원칙에 따라 과거에 사용하던 외래어 중 한자어 표기, 일본어 방식의 표기들 중 많은 부분이 순수한 한글로 대체되거나 현지의 음가를 반영하는 용어로 수정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국가명칭 중에는 비율빈→필리핀, 불란서→프랑스, 화란→네덜란드 등의 경우를 들 수 있으며, 지역명칭 중에는 북경→베이징, 동경→도오쿄오, 나성→로스엔젤레스 또는 LA 등으로 변경되어 사용되고 있다. 그 같은 추세에 따라 과거(1960년∼1980년대) 국민 모두가 공통적으로 사용했던 용어였던 ‘월남전쟁’이 최근에는 자연스럽게 ‘베트남전쟁’으로 바꿔지고 있는 것이다. 국립국어원이 편찬한 표준국어대사전(1999. 11. 29)에도 ‘월남전쟁’ 대신 ‘베트남전쟁’을 수록해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베트남전쟁 (Vietnam 戰爭) :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위하여 벌인 전쟁. 1960년에 결성된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이 북베트남의 지원 아래 남베트남군 및 이들을 지원하는 미국군과 싸워 이겨 1969년에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으며 미군 철수 후 1975년에 남베트남 정부가 무너짐으로써 남북이 통일되었다.” 또한 중·고등학교의 모든 근·현대사 교과서에도 ‘베트남파병’, ‘베트남전쟁’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예: 대한교과서주, 273쪽). 현재까지 ‘월남파병’, ‘월남전쟁’으로 표기하고 있는 교과서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 같은 배경에는 국민들이 세계화추세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를 더 선호하는 것도 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예를 들어 베트남전쟁의 중요한 당사국이었던 미국 등 영어권 사용 국가들은 최초부터 'Vietnam War(베트남전쟁)', ‘South Vietnam(남베트남)’, ‘North Vietnam(북베트남)’ 등의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한국군 파병 및 활동과 관련된 모든 문서에 서도 'Vietnam War', ‘South Vietnam’, ‘North Vietnam’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한편 타이완(자유중국) 및 중국(중공) 등 한자 언어권 국가들의 경우도 ‘越南(월남)’이라고 표기했지만 발음은 ‘위에(트)남’이라고 해서 영어와 유사한 음가를 사용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월남(越南) 또는 베트남(Vietnam)을 ‘越南’으로 표기하고 월남으로 발음하게 된 배경은 우리나라가 중국식 표기인 ‘越南’과 그 음가를 그대로 받아들여 표기 및 발음해 온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최초에는 중국과 우리나라가 같은 표기 및 음가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표기법은 바뀌지 않았지만 그 음가는 한국식으로 변화되어왔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중국과 다른 음가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월남’이라는 발음은 오로지 우리나라에서만 사용되는 음가인 것이다. 반면 같은 방식의 표기인 미국(美國), 중국(中國), 일본(日本), 영국(英國), 호주(濠洲), 대만(臺灣) 등의 명칭은 많은 국민들이 자연스럽게 종전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그중 일부 국가명칭은 점차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명칭으로 변화되고 있는 추세다. 호주→오스트레일리아, 대만→타이완 등이 그 같은 사례이며 장래에는 중국은 차이나로, 일본은 제펜으로 바뀌어 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다. 검토결과 이상과 같은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월남파병’과 ‘베트남파병’은 “어느 것이 맞다, 틀리다.”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언어의 순화기능에 의해 우리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용어로 점차 통일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같은 현실적인 요인을 반영해 ‘베트남’ 및 ‘베트남전쟁’을 표준어로 제정해 활용하게 된 것이다. 반면 아직까지도 일부 참전용사를 중심으로 ‘월남파병’, ‘월남전쟁’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표준어를 사용하는 국민들이 더욱 증가할 것으로 판단된다.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의 베트남(월남)전쟁 명칭 변천 경과
가. 2000년 9월 1일, 군사편찬연구소 창설 이전

군사편찬연구소의 전신인 전사편찬위원회(1964.8∼1991.12) 및 국방군사연구소(1992.1∼2000.8) 시기에는 대부분 월남전쟁 및 월남파병으로 표기했으며, 부분적으로 베트남전쟁 및 베트남파병으로 표기했다.

나. 2000년 9월 1일, 군사편찬연구소 창설 이후
  • 증언을 통해본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발간(2001. 12. 7)과 관련 연구원 2차에 걸친 전체토의(1차: 2001. 10. 12, 2차: 2001. 11. 19)를 통해 책자 명칭을 “증언을 통해본 베트남전쟁과 한국군”으로 결정 하였다.

    ※ 위의 결정은 과거 월남전쟁으로 표기해오던 용어를 시대의 변천에 따라 베트남전쟁으로 바꾼 것일 뿐 “옳다” 또는 “그르다”의 결정은 아니었다. 따라서 2001년 12월 이후엔 부분적으로 베트남전쟁과 월남전쟁이 혼용되었지만 대부분의 표기가 베트남전쟁으로 변경되었다.

  • 2001년, 증언을 통해본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발간 이후 국방부 및 각 군 본부 공식행사에서 베트남으로 사용
  • 2001년 이후 교육인적자원부 및 외교통상부 등 정부기관에서도 베트남으로 교과서 용어 수정

    ※ 국립국어원이 편찬한 표준국어대사전(1999. 11. 29)에는 1999년부터 ‘월남전쟁’ 대신 ‘베트남전쟁’을 수록해 ‘베트남전쟁’을 표준어로 명기, ‘월남전쟁’은 삭제. 따라서 표준어 사전에 월남전쟁 항목은 없음

※ 참고자료 : 베트남전쟁 명칭에 관한 연구

베트남전쟁 관련 명칭 사용 실태
1. ‘베트남(Viet Nam : 越南)’의 명칭 유래

과거 중국은 자신들의 동북지역 및 동남지역 등 변방지역에서 새로운 권력자가 나타날 때마다 그들에게 국가명칭과 왕위를 승인해 주는 절차를 통해 속방으로 삼았다. 1392년 이성계가 ‘조선(朝鮮)’을 건국했을 때 국가명칭과 이성계의 즉위를 승인해준 것도 그 같은 조치의 일환이었다. 그 같은 관례에 따라 1802년 베트남 북부지역까지 점령해 통일왕조를 수립한 응웬푹아인은 1803년, 청(淸)에 사절을 보내 새로운 왕국의 국호를 남비엣(Nam Viet : 南越)으로 해줄 것과 자신을 국왕에 봉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청은 남비엣(越南)이 과거 남중국을 지배했던 찌에우다의 남비엣을 상기시킨다는 이유로 승인을 거부한 후 남비엣(南越)의 두 글자를 서로 바꾸어 ‘베트남(Viet Nam : 越南)’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도록 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는 ‘베트남’이라는 국명이 만들어 졌다.

※ 찌에우다의 남비엣(南越) : BC207~111년, 지금의 남중국 광둥성, 광시성 일대에 수립됐던 왕국으로 BC179년 지금의 베트남북부지역을 점령해 BC111년까지 지배했다. 따라서 중국은 응웬푹아인이 요청한 국가명칭을 남비엣으로 승인해 줄 경우 차후 베트남과 영토분쟁에 휘말릴 것을 우려해 그 명칭을 베트남으로 바꾸도록 했다.

2. ‘베트민(Viet Minh : 越盟)’의 명칭 유래

1941년 5월, 호찌민(胡志明)이 베트남 북부 국경지대에서 공산당 제8차 중앙위원회를 주재했다. 그때의 회의에서 일본의 베트남지배에 효과적으로 저항하기 위해 베트남 독립을 위한 단체로 ‘베트남독립동맹(Viet Nam Doc Lap Dong Minh)’이 탄생했다. 그 ‘베트남독립동맹’ 약칭으로 ‘베트민(Viet Minh : 越盟)’으로 알려지게 됐으며 프랑스와 일본 세력을 타도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를 포함한 각계각층의 혁명세력들을 규합하는 ‘베트남 민족주의’를 표방했다. 당시의 여건에서 일반 대중들에게 공산주의에 대한 호소력이 약하다는 사실을 간파한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세력을 용이하게 동원하기 위해 민족주의 세력을 이용했던 것이다. 그 후 1945년 9월 2일, ‘베트민’ 주도로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수립됨으로써 베트민은 그 목적을 달성한 후 사실상 소멸됐다.

3. ‘베트남민주공화국(越南民主共和國)’의 명칭 유래

베트남 국민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함께 일본의 항복이 임박해 지자, 중국과 국경 산악지역에 해방구를 구축하고 있던 베트민은 기회를 잡았다. 그들은 일본의 항복과 동시에 즉각 행동에 나설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8월 16일, 각계의 대표 60명으로 인민의회(人民議會)를 구성했다. 이어서 베트민의 무장세력을 해방군(解放軍)으로 명명하고 하노이에 침투시켰다. 8월 18일, 하노이의 모든 공공시설을 접수한 베트민은 바오다이 황제의 퇴위를 요구했다. 바오다이는 호찌민에게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도록 제안했으나 호찌민이 거절하자, 8월 25일 “호찌민을 지지한다.”고 선언한 후 퇴위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이를 ‘8월혁명’이라고 부른다. 하노이에 개선(凱旋)한 호찌민은 8월 29일, 내각을 구성하고, 9월 2일 50만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인용해 베트남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Viet Nam)의 수립을 선포했다. 이에 따라 베트민은 북부지역에서 비교적 용이하게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어서 베트민은 남부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존의 종교단체와 독립단체 등의 연합전선에 대해 실력행사를 통해 물러나게 하고, 모든 행정조직을 장악했다. 이로써 베트민은 북부는 물론 남부지역에서도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 후 프랑스와 독립전쟁을 시작한 호찌민 세력은 1954년 5월 7일, 프랑스 세력을 격파하고 승리했다. 패배한 프랑스는 1954년 7월 20일 제네바에서 호찌민측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북은 호찌민이 통제하고 남은 프랑스가 옹립한 바오다이 황제 체제를 유지하되 2년 후에 선거를 실시 통일정부를 구성하도록 하고 철수했다. 따라서 최소한 1954년 7월 20일 이후 ‘베트남민주공화국’은 국제사회로부터 승인된 국가로 인정되었다.

4. ‘베트남공화국(越南共和國)’의 명칭 유래

남베트남에 강력한 반공정부가 수립되려면 보다 참신한 인물과 새로운 정부가 필요했다. 프랑스가 세운 바오다이 체제는 한계가 있었다. 그 같은 미국의 요구에 부합되는 인물이 바로 응오딘지엠(Ngo Dinh Diem : 1901~1963)이었다. 프랑스의 탄압에 반발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지엠’은 1954년 6월, 제네바 평화협정이 체결되기 직전에 귀국해 바오다이 정부의 수상이 됐다. 그때부터 지엠은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어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55년 10월 26일, ‘베트남공화국(the Republic of Vietnam)’을 수립하고 자신이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 결과 베트남에는 정식국가명칭으로 ‘베트남공화국(the Republic of Vietnam)’과 베트남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Viet Nam), 약칭으로 ‘남베트남(South Vietnam)’, ‘북베트남(North Vietnam)’을 사용하며, 각각 자본주의체제와 사회주의체제를 지향하는 두개의 국가가 수립되어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하는 새로운 남·북 분단체제가 형성되었다.

5.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越南社會主義共和國)’의 명칭 유래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 군대가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점령함에 따라 1955년 10월 26일, 지엠에 의해 건국된 ‘베트남공화국(the Republic of Vietnam)’은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무력에 의해 남베트남을 점령한 북베트남은 국가 통합에 착수했다. 그리고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NLF)와 같은 기구들을 무력화시키고, 1976년 7월 2일, 북베트남이 주도하는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the Socialist Republic Vietnam)’에 흡수 통합했다.

분석 및 검토
1. Viet Nam(越南)의 음가는 ‘베트남(위에트남)’이다

Vietnam의 음가를 한자로 표기할 경우 越南이 되는 것이며 중국식 발음은 ‘위에(트)남’이다. 그 한자를 한국이 도입해 한국식 음가로 발음한 것이 월남이다. 따라서 월남이라는 음가는 한국에서만 사용하는 것이다. 현대에 들어와서 외국의 국명, 지명 인명 등은 가급적 현지의 음가에 가깝도록 표기하는 것이 원칙이다. 미국도 베트남전쟁(Vietnam War), 남베트남(South Vietnam), 북베트남(North Vietnam)으로 표기했다.

2. 1960년대 한국이 구분한 월남(越南)/월맹(越盟)의 대비는 당시 우리가 지원하는 남베트남에게 역사의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으로 정치적인 해석이었다.

베트남(越南)은 베트남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며. 남부를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었다. 베트남전쟁 당시 월맹(越盟)은 존재하지 않았던 단체였다. 越盟(Viet Minh)은 베트남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만들었던 독립단체 중 하나였으며 그 단체가 중심이 되어 1945년 9월 2일, 베트남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Viet Nam)을 수립했다. 그리고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베트남민주공화국은 1954년 7월 20일, 프랑스 등과 제네바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국제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따라서 1960년대에 남베트남을 월남(越南)으로, 북베트남을 월맹(越盟)으로 구분한 것은 오로지 한국에서 만 사용되는 분류법이었다. 그 같은 분류는 정치적인 것이었으며, 학술적으로 인정된 것은 아니었다.

3. 당시 사용했던 문서 등 관련기록을 표기할 때는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반영해 월남(越南)으로 표기하는 것은 적절하다.

당시에 사용했던 문서에 명시된 월남(越南)은 역사적 측면에서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반면 현재에 사용하는 용어는 ‘베트남’으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4. 월남(越南)을 고집할 경우 수교국인 베트남과 외교문제를 야기 시킬 수도 있다.

예로부터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고 한다. 베트남전쟁의 승리자는 현재의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다. 전 후 베트남은 자본주의 체제의 국가들과 국교를 수립하면서 우호협력관계를 증진시켜왔다. 그 과정에서 한·베트남 두 나라는 1992년 12월 22일, 국교를 수립하고 대사급외교관을 교환하면서 우방국의 관계로 발전했다. 이어 두 나라는 해를 거듭할수록 우호협력관계를 더욱 발전시키면서 오늘날에서 ‘포괄적동반자관계’를 거쳐 ‘전략적협력동반자관계’(2009. 10. 22)로 발전했다. 따라서 양국의 관계는 상호주의적 관점에서 발전되어온 협력관계를 고려해야한 한다. 국가의 명칭, 과거 역사와 관련된 용어 역시 상호주의적 관점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소는 국민들, 특히 신세대들의 용어사용 추세를 반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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